2. 경제 문제 작가 빅토르 시클롭스키는 1917년 2월 식품 가게 앞에 늘어선 행렬 속에서 페테르부르크 시민들이 별 것 아닌 식빵을 간절한 눈빛으로 애처롭게 바라보던 장면을 기억한다고 썼다. 역설적인 것은 2월 혁명이 발발하던 시기 나라 전체에는 빵과 식료품들이 충분했지만, 물류 문제 때문에 적시에 물자를 공급받는 곳은 전선뿐이었다는 사실이다. 수도를 비롯해 후방에는 식량이 부족해 굶주리는 사람이 나타났고 이는 군중들이 격분하는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역사학자이자 경제학자인 미하일 플로린스크는 이렇게 회고한다. "당시 산업 생산성은 계획된 목표에 처참할 정도로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후반에 접어들 때는 비효율적인 철도 운영과 공산품 부족으로 도시민들은 큰 고통을 겪었다." |
임시정부를 전복시킨 힘은 강경 좌파인 볼셰비키였다. 4월 16일(구력 4월 3일) 스위스 망명 생활을 접고 페트로그라드로 귀환한 볼셰비키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은 곧바로 급진노선에 따른 적극적 선동활동을 펼치기 시작한다. 레닌은 <4월 테제>에서 즉각적인 전쟁 종식, 토지 국유화, '부르주아 자유주의적인' 임시정부 권력의 소비에트 이양 같은 주장을 폈다. 그러나 레닌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
1917년 4월 임시정부의 외무장관 파벨 밀류코프는 연합국에 보내는 외교문서에서 러시아는 모든 의무를 다 이행할 것이며 최후의 승리를 거둘 때까지 전쟁을 계속하겠다고 약속했다. 이 사건은 전쟁에 지쳐있던 보통 사람들을 격노케 했다. 대규모 집회와 시위가 이틀간 계속되었다. 사람들은 전쟁 중단, 정부 해산, 소비에트로의 권력 이양을 촉구했다. 위태로운 사태가 한 풀 꺾이면서 밀류코프 장관은 경질되었고 온건 사회주의자들(볼셰비키 제외)이 임시정부로 입각했다. |
7월이 되자 새로운 위기국면이 닥친다. 7월 16~18일(구력 7월 3~5일)에 무장한 해군, 노동자, 아나키스트들을 페트로그라드 거리로 집결시킨 볼셰비키가 임시정부와 직접 충돌하게 된다. 정부는 친위대의 도움으로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에게!'라고 크게 외치는 시위대를 가까스로 해산시킨다. 볼셰비키는 독일 첩자로 몰리면서 비합법적 조직이 된다. 레닌은 잠시 핀란드로 피신한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임시정부 총리가 모든 권력을 거머쥔다. |
임시정부는 좌파의 공격을 겪어 냈지만 다시 우파의 공격이 기다리고 있었다. 라브르 코르닐로프 최고 총사령관은 9월 7일(구력 8월 25일) 케렌스키와 합의한 대로 군부 독재를 이룰 야망을 품고 페트로그라드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권력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코르닐로프와의 동맹 관계를 끊고 결국 좌파 사회주의자들에게 도움을 청한다. 복권된 볼셰비키의 도움으로 페트로그라드로 진격하는 군대를 멈추게 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케렌스키의 권위는 심각하게 훼손됐다. |